[이코노미한국]조지오웰의 시대는 어떻게 오는가

이코노미한국 | 기사입력 2015/09/18 [15:06]

[이코노미한국]조지오웰의 시대는 어떻게 오는가

이코노미한국 | 입력 : 2015/09/18 [15:06]

/김석훈기자 shkim@hankooke.com

1984년 1월 1일 정오(미국시간). 비디오예술가 백남준은 최첨단 테크놀로지인 인공위성을 통한 ?생중계 쇼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을 방송합니다. 1시간 가량 진행된 이 방송은 지구 이편과 저편을 시공으로 연결하며 대중예술과 전위예술, 고급예술을 불문하고 당시 최고의 예술가들을 우주라는 시공간에서 만나게 해서 벌인 사상 최초의 예술쇼로 화제가 됐었습니다. 백남준이라는 이름을 세계적인 천재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르게 했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그때서야 고국인 한국에 알려 그는 그해 6월 22일, 34년 만에 대한민국의 초대를 받아 귀국합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의 주제는 낙관적입니다. 조지 오웰은 1949년 발표한 소설 ‘1984’를 통해 독재자 빅 브라더가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회를 끊임없이 감시하는 암울한 미래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백남준은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묘사한 암울한 기계문명시대를 뒤엎으며, 기술은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시켜 준다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세계관을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투영시킵니다.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2016년. 전세계는 다시 빅데이터가 만들어낼 ‘빅브라더’의 세상을 다시 주목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 일이지만 빅데이터의 발흥은 간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인류는 디지털 데이터를 통해 자신이 싸우고 사랑하고 나이 드는 모습과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변해 가는지까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저 들여다보기만 하면 됩니다. 전체 데이터 중 아주 작은 부분만 살펴보더라도,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드러납니다.

검색창에 한번 쳐본 궁금한 단어나 문장도 모이면 데이터가 됩니다. 페이스북, 구글, 인스타그램, 네이버, 카카오(다음)은 사(私) 기업이면서 동시에 규모와 완전성과 중요성 면에서 이제껏 존재한 적 없는 거대한 인구 통계 기구이기도 합니다.

정부는 사이버 전쟁 혹은 사이버 범죄라는 명목으로 기업들을 통제하거나 혹은 기업과 연계해 엄청난 양의 개인정보를 공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 로 잘 알게 됐습니다.

NSA(미 국가안보국)의 협력자였던 스노든의 폭로에서 드러났듯이 NSA는 세계 곳곳에 있는 수만 대의 컴퓨터에 심어놓은 스파이웨어로 범세계적인 감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구글이나 야후,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거대 IT기업들과 연대해 방대한 개인정보를 수집해 공격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최근 벌어진 ‘카카오톡 검열사태’가 정부가 개인의 정보를 마음대로 들여다보는 시대를 예고하는 하나의 중요한 힌트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특히 정부나 거대 기업에게 각각의 개인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성을 제거한 사용자 ID로 환원된 후 정부가 민간을 지배하는 정신적 툴로 들어가거나 기업들의 마케팅 알고리즘 분쇄기로 들어가 지배나 마케팅을 위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일을 인터넷으로 해결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숫자로 환원되는 것은 당연한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어디서나 감시가 이루어질 현실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어떻게 보호받아야 할까요.

‘트루먼쇼’는 정보 사회에서 사회의 욕망이 어떻게 왜곡돼 개인에 대한 감시와 관음을 정당화시키는지를 보여 주는 영화입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트루먼은 오직 그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트와 배경들, 그를 위해 짜여진 각본 속 사람들 속에서 성장해 왔고, 모든 장면은 24시간 생중계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 절친한 친구는 물론 주변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배우이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트루먼이 아기일 때부터 일거수일투족에 박수를 치고 울고 웃으며 그의 성장을 지켜봐 왔지만 그 자신만 이를 몰랐습니다.

영화 속에서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행동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 진심어린 응원자처럼 등장합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후 트루먼이 마지막에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도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사람들은 트루먼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환호하죠. 그러나 그들 역시 트루먼에게는 가해자일 뿐입니다. 그들 역시 감시자로서 트루먼 자신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사생활을 오로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들여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부도덕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죄의식 없이 트루먼의 인생을 구경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런 식의 감시가 문화적으로 허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지의 감시가 아니라 누구나에게나 허용된 문화적, 대중적 오락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감시인데도 감시는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기만하고 오락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미덕입니다.

여기서 던지는 질문하나. 원자폭탄을 발명한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이 20세기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살상무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한 사회의 통제능력 이상으로 기술과 정보가 비정상적으로 사회에 착근되는 상황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인간은 영혼이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걸고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고팔 수 있는 생필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이 어느때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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